블라디보스토크 기행 3

2019. 11. 12. 12:04유라시아학당/2018 블라디보스토크기행

블라디보스토크 기행 3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려나보다. 아침 기온이 영하 19도를 가리킨다. 서울도 영하 10도라 한다. 추위가 연동되는 걸 보니 같은 기단에 속해 있음을 실감한다. 아직 12월 초니 당분간은 더 추워질테다. 한 겨울엔 영하 30도까지 오르내린다하니 한국에선 체감해보지 못할 추위다. 그러나 실내는 의외로 따뜻하다 못해 더울 지경이다. 벽은 두껍고, 창문은 한겹이지만 속유리는 공기층을 넣은 두겹을 쓰니 단열이 우수하다. 거기에 라지에이터로 실내공기를 데워 반팔을 입어도 될 정도다.

 



먹거리는 입맛에 맞고, 체감물가는 한국의 절반에서 2/3 수준이다. 한국 물가가 비싸다는걸 밖으로 나올 때마다 느낀다. 거리에는 중고 대우버스가 다니고, 승용차는 일제가 많다. 에어컨은 LG브랜드가 많고, 과자도 초코파이와 껌, 도시락라면을 비롯해 한국산이 많이 보인다. 중국산 가전제품도 심심찮게 보인다. 한중일의 공산품들이 흔히 보이니 새삼 블라디가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블라디보스토크>

과거 중국에서 작은 어촌으로 해삼위(海参崴)로 불렸던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령이 된 이후에 점차 국제도시로 변모해간다. 상업에 능했던 중국상인들은 아르바트 거리에 모여 살며 차이나타운을 형성했다. 조선에서는 19세기말 기근을 피해 넘어와 토지를 개간하기 시작한 뒤 일제강점기 시절 대거 이주를 한다. 이 일대가 간도라 불리었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독립운동가들의 주 활동무대가 되었다가 소련이 만주에서 철수하는 1930년대를 전후로 독립운동의 거점은 붕괴되고 조선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고 만다. 시내에는 독립운동의 후원자였던 최재형선생의 구옥터와 독립운동가들이 살았던 신한촌 기념비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후 소련이 해체되는 1991년까지 블라디는 태평양함대가 주둔하는 곳이자 외부인 접근을 막은 폐쇄된 군사도시가 되었다. 냉전의 최전선이었다. 단기비자를 완화해 관광객을 받아들인 것이 최근인 2014년이다.

한민족과 블라디의 역사적 인연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르세니예프 향토박물관이 있다. 1902년 연해주를 탐험한 러시아인 아르세니예프를 기념한 박물관으로, 국내에는 '데르수 우잘라'라는 책을 통해 알려져 있다. 일본인 구로사와 감독이 1975년 영화화 하기도 했다. 데르수 우잘라는 연해주의 선주민인 나나이인으로, 아르세니예프를 도와 연해주 시호테알린 산맥 일대를 탐험한 인물이다. 책에서 그는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는 선주민들의 관점을 전해준다.

흥미롭게도 이 박물관에는 발해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러시아는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기록해 가고 있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서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 입장에서는 왠 억지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해야만 현재의 영토와 문화의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으니 어지간한 국가라면 자국영토에 포함된 역사는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할 터이다.

이런 모순을 극복하려면 누구의 역사냐고 묻는 질문 자체를 되물어야 한다. 고대사를 한 나라의 역사로 편입해야만 하는 것도 국경이 중요해진 제국주의 시대의 잔재일테다. 국경을 선으로 가르고 니것 아니면 내것이라고 이분법으로 잘라 사고 하는 관점은 역사와 문화가 분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중첩된 면 속에서 형성되는 특징을 반영하지 못한다.

한 나라의 역사를 일국의 소유로 할 것이 아니라 인류의 공유재로 보고 전체가 평화롭게 통합해가는 방향으로 활용해간다면 훨씬 가치 있지 않을까. 딱딱한 국가관이 유연해져간다면 자연스레 따라올 변화일테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9288km 떨어진 모스크바까지 꼬박 6박 7일이 걸리는 이 길은 우리에겐 통일이 된다면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유럽까지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길이기도 하다.

 



189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 착공식이 열린다. 일찌감치 전 세계에 식민지를 경영하는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에 뒤쳐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러시아는 극동을 향한 시베리아 내륙 철도 건설에 사활을 걸었다. 바이칼 호수까지 이어진 열차선을 블라디와 연결하기 위해 청과의 국경을 따라 북쪽으로 빙 둘러가기보다 만주를 관통하는 라인을 구축하기로 한다.

 



1895년,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한 청정부는 러시아에 기대어 일본을 견제키로 한다. 러시아는 동맹의 댓가로 만저우리에서 하얼빈을 지나 블라디까지 이어지는, 만주를 관통하는 철도 부설권을 얻어낸다. 러시아의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놓친데다 철도가 완성되면 러시아 군대가 쉽게 동북아에 들어올 것을 염려한 일본은 러시아와의 충돌을 염두에 두며 일전을 치를 준비를 시작한다.

당시 중국에서의 이권을 노리던 영국 역시 러시아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여수 옆에 자리한 거문도를 영국 수군이 3년간 무단으로 점령한 것도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한 대응책의 일환이었다. 영국의 견제에 조급해진 러시아는 무리수를 두며 하얼빈에서 대련까지 이어지는 철도 부설권을 청으로부터 반강제적으로 얻게 된다. 이는 청 국민의 반감을 일으켜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철도를 파괴하는 등 반러운동으로 번지고, 청이 영국, 일본과 다시 손잡고 러시아를 견제하는 계기가 된다. 이 긴장은 결국 1904년, 러일 전쟁으로 분출된다. 당시 동북아 정세는 만주를 두고 세계열강이 힘을 겨루는 각축장이었다.

러일전쟁에서 패해 남만주철도(하얼빈-대련간 철도) 운영권을 일본에 넘겨준 러시아는 동청철도(만저우리-하얼빈-블라디보스토크 철도) 운영에 집중하게 된다. 북만주까지 노리던 일본은 러시아가 동청철도를 통해 얻는 이익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중국 길림성 장춘과 북한의 회령을 거쳐 나진항까지 잇는 길회철도를 부설한다.

1932년, 철도가 완성되자 함경도 나진항을 통해 공급된 물자가 길회철도를 거쳐 시베리아횡단 철도를 통해 유럽으로 연결된다. 나진항이 번성하자 상대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항은 쇠락하게 되고 동청철도 역시 적자가 쌓이게 된다. 1933년, 소련은 동청철도를 일본에 매각하며 만주에서 철수한다.

 



블라디의 미래를 가늠해볼 때 이 역사를 참고해 볼 만하다. 현재 중국은 동해출구를 얻기 위해 북한의 나진과 선봉(나선특별시)의 항만 일부를 장기 임대하였고, 두만강을 통해 훈춘까지 이으려 한다. 훈춘에서 만주를 통과한 철도는 유럽으로 이어질테다. 이 라인이 완성되면 항구로서의 블라디와 바이칼까지의 철도 노선의 가치가 줄어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 하나의 변수는 북해항로다. 동북아에서 말라카해협과 수에즈 운하를 거치는 것보다 30퍼센트 이상 물류비가 절약된다는 북해항로가 본격적으로 열리면 동북아의 주요 항구들에 새로운 판도가 펼쳐질 것이다.

이런 변화를 염두에 두고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제2의 수도로 삼으려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공을 들이고 있고, 중국은 두만강을 통한 동해출구를 얻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며, 일본으로서도 유럽으로 통하는 최단거리 라인을 원할테니 당분간 이 지역의 키는 북한이 쥐고 있을 듯 하다. 나선지구의 가치를 최대한 높이되 중러일 일방에 힘이 쏠리지 않을 한 수를 김정은은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보면 볼수록 이 지역의 판세가 흥미롭고, 펼쳐질 미래가 궁금하다. 우리는 어떤가. 어떻게 보고 있고, 어디까지 보고 있나. 질문의 종착역이자 출발점이다.

 



유럽이라던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 아시아를 주목하게 된다. 떨어져 보니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한참 공부에 흥이 붙으려 하니 금새 돌아갈 때가 된다. 한번에 끝날 공부가 아니다. 두고두고, 대를 이어서 여럿이 함께 해나갈 공부니 조급해할 일도 아니다. 어디로 향할 것인가. 방향을 아는 것이 우선일테다.

블라디의 겨울엔 밤이 일찍 찾아온다. 내년을 기약하며 마지막밤을 보냈다.

 

2018.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