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삶 - 가을, 볼음도에서의 일상

2019. 11. 27. 19:34볼음도 프로젝트/2018 볼음도 일기

*2018.12.5 발행된 잡지<강화시선> 10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단순한 삶

아침 6시 반. 푸른 새벽빛에 눈이 간지럽다.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고는 밭으로 나간다. 아직 축축한 흙속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고구마가 예쁘다. 그 붉은 귀한 보석을 다치지 않게 살살 구해낸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고구마를 캐다보면 어느새 해가 머리위에 와있다. 쌀쌀한 아침바람에 껴입었던 옷을 벗을 때다. 저쪽에서 밥 먹자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식사를 준비해주는 누군가에게 진한 고마움을 느끼며 반갑게 달려간다. 점심은 어제 담근 게장과 매운탕이다. 든든히 먹은 후엔 다시 밭으로 간다. 박스에 고구마를 담다가, 옆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아이들을 보며 웃다가, 철세 떼가 울며 지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보면, 어둑어둑 산 그림자가 진다. 서둘러 정리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호미와 장갑을 벗어두고, 따듯한 물에 목욕을 하고, 뻐근한 허리를 마사지하며 밤을 맞는다. 신성한 밭일과, 감사한 밥과, 호의로 가득한 사람들, 그리고 하늘뿐인 하루하루. 고구마를 수확하는 요 며칠의 단순한 일과가 참 좋다.

우리의 고구마 밭은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에 있다.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1시간 넘짓 가면 나오는, 보름달을 닮은 아름다운 섬이다. 이곳에 귀농을 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사는 집은 인천 검암(우동사 라는 공동주거기반 마을공동체에 살고 있다)이고, 올 해 봄부터 검암과 볼음도를 오가며 쌀농사, 고구마농사를 짓고 있다. 볼음도의 호인 오반장님의 도움아래, 우동사의 촌장님 정훈과, 농사를 포함한 이것저것에 관심 많은 나, 그리고 게릴라로 참여하는 검암동 사람들이 함께 천천히 농사와 시골생활을 배워가고 있다. 볼음도에서 일하다 만나는 어르신들과 이야기하거나, 밖에서 나를 소개할 때면, 나이 25살 청년이 정장입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장화신고 논밭을 다닌다는 것에 꽤 의아해하신다. 어쩌다 이곳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을까.

몇 년 전,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차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로 부터는 도저히 내 길을 찾을 수 없었고, 무엇이든 내가 좋아하고 즐거운 일을 하며 살고 싶지만 대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건지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가 없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재미도 의미도 없는 일을 하며 돈부터 벌기는 더더욱 싫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우동사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몇 차례 오가면서 만난 우동사 사람들의 표정과 목소리에서는 특유의 편안함과 생기가 흘러나왔다. 그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마음이 편해지고, 내가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들이 어떤 특정한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떤 삶을 지향하고 직접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여럿이 함께 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살 곳이 바로 이곳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작년 봄, 검암에서 살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도 그 편안함과 생기를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

검암으로 이주하는 동시에 난 비전화공방(非電化工房)서울에서 제작자 활동도 시작했다. 비전화공방은 전기와 화학물질의 사용으로 대표되는, 돈과 에너지가 풍족한 삶이, 더는 사람의 행복과 건강한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전기와 화학물질을 적게 사용함으로써 지속가능하면서도, 진정으로 행복한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단체다. 유기순환농사, 생태건축, 비전화제품 만들기, 작은일 만들기(3만엔 비즈니스), 방사능과 에너지에 대한 공부 등 다양한 것을 배우는데, 결국 인간의 삶을 이루는 크고 작은 요소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며, 보다 자립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탐구를 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터라, 비전화제품에 대해 배우고 싶어서 지원했었는데, 활동을 하면서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을 마주하게 됐다. 적정기술을 왜 배우고 싶은 건지, 배워서 무얼 하고싶은지, 농사를 왜 짓고 싶은 건지, 농사를 짓는 삶이란 어떤 삶인지. 단순히 무엇을 하고싶은지를 넘어, 어떤 삶의 풍경을 그리는지. ‘바라는 삶을 살아내는 힘을 기릅니다.’ 라는 문구에 걸맞게, 제작자로 활동한 1년은 내가 바라는 삶을 구체화하고, 그를 실현할 수 있는 자신감을 기르는 시간이었다.

 

내가 바라는 삶. 추상적으로는 자유롭고 행복하게, 자연스럽고 인간답게, 잘 사는 삶이라 표현하곤 했지만, 그래서 어떤 일상을 살고싶은지 그려보면 참 단순하다. 아침에 일어나 천천히 몸을 깨우고, 내가 먹을거리를 직접 기르거나 채집하고, 정성스레 요리해서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먹고, 내가 필요한 물건은 웬만하면 직접 만들고, 직접 고치고, 배우고 싶은 걸 배우고, 탐구하고, 탐험하고,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하는, 안정감과 따듯함이 감도는 일상. 무엇보다도, 하고싶은 것을 참거나 미루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하는 삶. 가려는 곳을 빙 돌아가지 않고, 바로 향함으로써 과정이 단순해지는 삶. 그런 삶을 살고싶다. 제작자과정을 마치고 볼음도에서 농사를 짓기로 택한 것은, 그런 삶으로 가는 길의 입구라는 생각에서다. 농사짓는 일을 시작으로, 집과 생활공간을 하나씩 꾸려가며, 점차 단순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려 한다. 서두르지 않고 한 발 씩, 단순한 작은 일상이 모여, 단순하고 인간다운 삶을 이루어가기를 나는 바란다.

 

 

남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