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 기행 1

2019. 11. 12. 11:53유라시아학당/2018 블라디보스토크기행

블라디보스토크 기행 1

러시아다. 국적기로 북한 영공을 돌아오느라 2시간반이 걸렸지만 질러오면 1시간반이면 도달하는 거리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니 과연 서울에서 베이징, 상하이, 도쿄까지만큼이나 지근거리다.

그럼에도 중국, 일본과 달리 러시아는 낯설다. 심리적 거리는 유럽보다도 멀다.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에 이은 유이한 국가임에도 줄곧 눈에 들지 않았다. 가깝지만 멀고 먼나라였다.

역사적으로 가까워진건 오래지 않다. 최초로 러시아와 접촉이 있었던 것이 17세기다. 우리에겐 나선정벌로 기록된, 청나라를 도와 출처를 알 수 없는 '북방의 오랑캐'를 토벌한 것이 첫만남이었다. 러시아가 16세기부터 시베리아를 점령하며 조금씩 동진하다 북만주에서 청과 부딪힌 사건이었다.

그 뒤로 공방을 거듭하던 가운데 맞이한 1860년, 서구 열강이 힘빠진 중국을 잠식해가는 틈에 러시아도 한 수 거들며 연해주를 얻는다. 그러니 우리와 영토를 접한건 불과 160년 전의 일이다. 두만강 하구, 불과 16km의 국경으로 조선과 접경을 이룸으로써 중국으로서는 동해출구를 잃고 말았다.

홍콩과 마카오의 반환을 통해 서구 열강의 상흔에서 중국은 완전히 회복한 듯 하지만 실은 러시아로 넘어갔던 만주와 연해주 땅은 그대로다. 때문에 이를 회복하려는 중국과 동진을 지속하려는 러시아의 힘겨루기는 현재진행형으로 보인다. 소련 붕괴 뒤 러시아가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볼수록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도 결코 줄었다 할 수 없다.

글을 통해 이병한이 걸었던 유라시아를 부지런히 뒤쫓다 최근에 닿은 곳이 블라디보스토크였다. 만주와 연해주, 시베리아를 환기시키다보니 역사의 변방으로 치부하던 동북아의 사각지대가 우리 삶터의 중심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게 되었다. 고구려와 발해의 고터이자 우리와 친숙한 북방민족이 교류하던 땅. 거기에 러시아라는 새로운 세력이 더해져 다음 역사가 쓰여지고 있는 역동의 공간.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 여장을 꾸려 두발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에서 내리던 비는 블라디에서도 이어졌다. 공항에는 발렌티나가 마중을 나와 주었다. 그녀와의 인연이 묘하다. 함께 공부하는 숙곰이 얼마 전 전북 진안에서 위빠사나 명상수련에 참가했는데 발렌티나도 그 자리에 온 것이다. 수련을 마치고 물어보니 러시아 사람에, 게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왔단다. 마치 기다렸던 양, 기꺼운 만남이 성사되었다.

발렌티나 니콜라이오브나 쿠드라는 블라디가 고향으로 고등학교 시절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와 영어가 유창하다. 대안적인 삶에 관심이 많은 두 아이의 엄마로 중국 알리바바의 타오바오망을 통해 조그맣게 무역업을 하고 있다. 20여 년 전에는 한국어도 공부한 적이 있단다.

공항에서 차를 타고 10여 분 떨어진 그녀의 집에 닿으니 큼직한 목조주택과 커다란 개, 그리고 늙은 고양이가 우리를 맞이한다. 2008년부터 준비해서 지은 전원주택이란다. 어머니와 남편,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식탁에는 꿀이 유명한 지역답게 꿀단지가 놓여져 있다. 저녁으로 스프와 흑밀빵, 오이샐러드, 양배추 무침을 내주었다. 스프는 '한 그릇 더'를 외칠 정도로 맛있고, 나머지도 매일 먹는 음식인양 입에 맞는다. 후식으로는 이반차와 초콜렛, 적당히 말린 대추가 나왔다. 대추의 당도가 상당하다. 익숙한 자연풍광에 놀라고, 이질감 없는 먹거리에 안심이 된다. 오랜 한중일 환동해 문명권 속에 러시아 문화가 접붙여진 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밥을 먹고 두 아이가 다니는 몬테소리 유치원에 들렸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몬테소리는 러시아에서도 유명한 대안적 유아교육공간이란다. 중산층 자제들이 다니는 듯하다. 그러나 이마저도 마음에 안드는지 발렌티나는 홈스쿨에 관심을 갖는다.

 



9살 난 딸 베로니카와 6살 된 아들 아르테르미를 차에 태워 블라디 시내로 향했다. 퇴근하는 남편과 만나 저녁을 대접하고 싶단다. 아이들은 밝고 에너지가 넘친다. 교통 체증이 심한 가운데도 꼬마아이들이 있어 지루하지 않게 올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을 보면서 자연스레 여민이의 미래를 가늠해보게 된다. 오늘의 한걸음이 아이들이 살아갈 다음 세상에 향한 징검다리가 될테다.

 

식당에 도착하니 준수한 외모의 남편 유라가 맞이한다. 발렌티나와 대학 동창으로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여행과 일로 서울, 대전, 대구, 마산을 다녀봤다며 한국 친구들과 찍은 사진도 여럿 보여준다. 얼굴이 선하다. 친근감이 든다.

거한 대접에 이어 숙소까지 배웅을 받았다. 이 가족이 아니었다면 거센 비 속에 공항에서 숙소까지 찾아오는 길이 꽤나 험난할뻔 했다. 고마움에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에어비앤비로 구한 숙소는 깔끔하다. 쌀쌀한 바깥과는 달리 집은 더울 정도다. 라지에이터 난방의 위력이 굉장하다. 이곳을 아지트 삼아 일주일 동안 러시아를, 블라디보스토크를, 환동해 문명권을 공부해 볼 생각이다. 낯선듯 익숙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첫날밤이 저문다.

 

2018.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