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남기행 1

2019. 11. 12. 11:28유라시아학당/2017 운남기행

운남기행 1

쿤밍에 도착했다. 오늘 밤은 쿤밍 창수이 국제 공항에서 묵기로 했다.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출발하여 도착시간이 늦어진데다 작년에 마련해 두었던 중국 휴대폰을 개통하려던 시도가 계속 어긋나 어느새 어둠이 우세한 시간이 되었다. 생명줄 같은 와이파이 하나 연결하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아무래도 나가는건 무리다. 내가 구하는 저렴한 숙소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어 전화도 인터넷도 안되는 상황에서 섣부르게 움직이다간 밤새 길거리를 배회하기 십상일테다.

<지하 3층>

물어보니 지하 3층으로 가란다. 지하 3층엔 서울역에서 볼 수 있는 노숙자 수면 방지용 난간이 있는 딱딱한 의자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난간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때가.. 노숙자들이여!

지하 3층엔 인도 사람, 아랍 사람, 동남아 사람, 중국 사람, 아프라카 사람, 그리고 한국 사람까지. 다인종 남녀노소가 머문다. 역시나 한켠엔 뜨거운 물이 있고, 누군가 먼저 시작한 중국 특색의 컵라면 냄새가 풍겨온다. 나 역시 중국과 인연 맺은지 어언 20여 년. 지하 3층으로 내려오는 길에 마트가 있어 본능적으로 컵라면을 5위엔 주고 하나 샀다. 노숙에 배까지 고프면 그것만큼 서러운 일도 없으니.

 


버섯닭육수컵라면으로 배를 채워두고 공원국씨가 쓴 '유라시아 신화기행'을 재밌게 읽다보니 어느새 12시가 넘었다. 조금 전 또 비행기가 도착했는지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온다. 앞으로 도착하는 사람들은 굳이 돈을 쓰지 않는다면 다들 여기로 오리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니 화기애애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내 앞 뒤론 연인이 앉아 그다지 춥지도 않은데 서로를 따뜻하게 보살펴준다. 이것 역시 익숙한 중국 특색이다.

방심하는 사이, 내 몫으로 자려고 소심하게 찜해두었던 옆 의자에 어떤 할아버지가 앉아버렸다. 매트라도 가지고 왔으면 침낭을 덮고 바닥에서 잘 수 있었을텐데. 그랬다면 이런 상황을 마치 예견이나 한 듯한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기쁘게 잠들었으리라.

누워자려던 마음을 내려두고 여행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은 무계획이다. 내 여행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늘 꼼꼼하게 일정을 잡고 움직였던터라 오히려 재미가 없을 정도였는데. 그러던 내가 당장 오늘 밤에 잘 곳도 마련해두지 않고 오다니. 게다가 당장 내일 뭘할지도 모른다. 청공구 대학가에 가서 저렴한 침대를 하나 잡고 대학가를 어슬렁거려볼까 하는 생각 정도만 하고 있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 오는지, 학생들의 눈빛은 어떻고, 얼마나 활기가 도는지 살펴보면서.

이번 여행은 답사란 이름으로 왔지만 뭘 위한 답사인지 명쾌하지가 않다. 어쩌면 돌아갈 때까지도 그럴지 모른다. 뭔가가 불러서 오긴 했는데.. 일단 그 감을 믿고 가본다. 조급해서 머리로 이것저것 대응하려고 하지 않고 마음이 따르는 곳으로 움직여보려 한다. 머리로 급조한 의미는 휘발성이 강하다. 마음에 집중해서 움직이면 당장 형태로 드러나는 건 없더라도 묵직하다. 두 발과 마음이 주가 되고 머리와 생각이 부가 되는 여행을 테마로 삼아보려 한다. 이런 구분도 군더더기, 생각의 습관일테다. 두 발을 많이 쓰면서, 그러다 어느 순간 툭 하고 떠오르는 알짜배기 생각을 기다려보려 한다.

어느새 밤 12시 40분이다. 지하철이 움직이는 시간까지는 대략 5시간 정도 남았다. 계속 앉아 있자니 몸이 버티기 어려운 지경에 접어들고 있다. 내일은 휴대폰부터 해결해야겠다. 범이가 도와주기로 했다. 객지에서 도움 받을 친구가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임시 거처에 숙박객이 많아지니 공안들이 신분증 검사를 하며 다닌다. 평소와는 달리 오늘따라 그 모습이 반갑다. 노숙 동지 중에 무서워보이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는데. 젊은 공안이 신분증을 한 번 봤을 뿐인데 오늘 밤은 마음 편히 자도 되겠다는 안심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잠이 안와 한참 책을 더 읽다 고개를 드니 사람들이 담요를 들고 잠자리를 만들고 있다. 정아가 내 처지를 걱정하며 찾아 보내준 내용에 관계자에게 담요를 청하면 준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사실이었다. 턱없이 부족한 담요는 눈 앞에서 게 눈 감추듯 동이 났다. 옆자리 할아버지도 어느새 담요를 덮고 저만치 구석에 가서 몸을 뉘인다. 나도 침낭을 꺼낼까 하다가 바닥에 정아가 준 침낭을 닿게 하고 싶지 않아 몸을 의자 난간 사이에 끼우고 잠을 청했다. 평소 새우잠 자는 습관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난간에 몸이 꼭 맞게 들어갔다. 첫날밤은 국제공항에서 국제인들과 함께 했다.

 

2017.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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