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덴마크 포크하이스쿨을 만났을 때 _ written by 이한나

2020. 9. 24. 09:22동네살이&일상/기고글

우동사에 함께 살던 고나(이한나)의 글을 필자 동의하에 옮겨왔습니다. 
한국어 원문은 고나의 브런치에서, 영어 원문은 Danish folk high Schools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When a Korean meets the Danish folk high school

STORY Hannah Lee, teacher at various alternative schools in Seoul and former student at International People’s College in Denmark, tells what happens When a Korean meets the Danish folk high school.

www.danishfolkhighschools.com

 

2015년 1월, 겨울의 한 가운데 덴마크에 도착했다. 길고 긴 겨울이 계속되는 동안 하루 종 일 해 한번 제대로 뜨지 않았다. 이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것인지 의문이 일었다. 청년 실업이 최대치를 찍고, 젊은이들 사이에 ‘탈조선’,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불안한 시기,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덴마크 사람들이 질투가 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IPC(International People’s College)에 갔다. 기회비용을 따져볼 때 어떻게든 덴마크에서 무언가를 발견 ‘해야만’ 했지만 그곳에서의 생활과 수업이 영 밍숭 맹숭하고, 성에 차지 않아 불만이 많았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 돌아보면 그것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내가 들었던 수업에서는 선생님의 강의보다는 학생들이 대화를 풀어내는 시간이 월등히 많았다. 주어진 과제에는 늘 정해진 답이 없었다. 이 문제를 풀고 나면 더 어렵고 복잡한 지식과 과제를 계속해서 ‘제공’ 할 것이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누구나 다 수업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과제만이 주어졌다. 


둘째, 풀벌레 소리와 넓은 잔디, 아름다운 연못을 끼고 있는 작고 조용한 캠퍼스에서의 넘치는 ‘자유시간’ 이었다. 숙제도, 시험도 없는 기숙형 학교인 포크하이스쿨답게 정해진 시수의 수업에만 출석하고 나면 그 외에는 늘 넉넉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장담하건데, 나는 자유시간을 가장 자유롭지 않게 보내는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주어졌지만 도무지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랐다. 이곳에 ‘유학’까지 왔으니 뭔가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비좁고 어둑한 지하의 도서관을 드나 들었다. 그곳에는 늘 노트북을 켜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한국 학생 한두명과 영단어 공부에 열중하는 일본학생들 무리가 있었다. 아, 또 한 부류가 더 있긴 했다. 화창한 날씨에 이들이 컴컴한 지하 도서관에서 뭘하고 있는지 궁금해 문을 빼꼼히 열던 여타 다른 문화권의 학생들이다. 

 "경쟁을 통한 줄 세우기식 교육이 너무나 깊숙이 내면화되어 경쟁이라곤 전혀 없는
포크하이스쿨 생활이 마치 ‘양념이 되지 않은 심심한 음식’처럼 밋밋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한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어깨에 힘이 조금씩 빠지면서 깨닫게 되는 지점들이 생겼다. 내가 시험을 통한 점수와 등급으로 평가 받는것에 나도 모르는 사이 익숙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경쟁을 통한 줄 세우기식 교육이 너무나 깊숙이 내면화되어 경쟁이라곤 전혀 없는 포크하이스쿨 생활이 마치 ‘양념이 되지 않은 심심한 음식’처럼 밋밋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학업성취도 측면에서 상위 3%에 드는 소위 ‘엘리트주의 교육’의 수혜자였다. 한국 교육의 기본적인 작동방식은 수직 서열화된 학교체계와, 이 서열화된 학교의 상위에 들어가기 위한 학생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 그리고 경쟁의 결과에 따른 차등적 보상이라고 하는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정답을 맞추어’ 나의 남다름을 드러내고 선생님께 칭찬 받기를 기대하던 교복입은 어린시절의 내 모습을 십년이 가까운 시간을 지나 고스란히 다시 마주 해야 했기에 IPC에서의 첫 학기는 참으로 여려웠다.  

IPC에서의 모든 수업은 특출난 상위 몇 퍼센트를 우선으로 키워내는데 주력하기 보다는 교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제 역할과 자리를 찾아 자기 몫을 할 수 있도록 잘 배분하고 그것을 돕는데에 큰 방향이 잡혀 있었다. 고로 나는 특별히 칭찬을 받을 이유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나야 할 필요도 없었다. 충격적이게도 나는 그 지점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의 현재

사람들이 내게 덴마크까지 가서 무엇을 배우고 느꼈냐고 물었을때, “모든 학생들이 조화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지혜를 배웠다”고 답하곤 한다. 이에 관련해 아주 사소하지만 내게 기억에 남는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큰 강당(Big Hall)에서 연극 선생님이 간단한 워밍업 게임을 진행하려고 게임의 룰과 방식을 설명하려던 참이었다. 옆에 있던 덴마크 친구가 손을 들고 지금 막 친구 한명이 화장실에 가서 자리를 잠시 비웠으니 조금 있다가 그 방법을 설명해 주는게 좋겠다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태도로 기다렸고 금새 그 친구가 돌아왔다. 다시 수업이 재개되었다. 

이 평범한 장면이 왜 유독 기억에 남느냐는 물음을 할 덴마크인이 있을것 같아 첨언을 한다. 한국에서의 입시경쟁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한창 입시공부에 열을 올리던 18세의 나는 선생님이 중요한 이야기를 할때 주변의 친구가 졸고 있거나 자리에 없으면 외려 남몰래 기뻐했더랬다. 너무 잔혹한가? 친구이기 이전에 경쟁자라는 계산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한국 젊은이들의 현실이다. 차별과 배제의 문화는 그렇게 우리 뼛속 깊숙이 자리 잡혔다. 그렇기에 내게 이 순간은 특별하게 여겨졌다. 이것은 단순히 친구를 배려하는 것 이상의 감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얻는 기회만큼 다른 사람도 같은 기회를 얻어야 한다는 것, 또한 다른 사람의 기회만큼 나의 기회도 중요하다는 것. 나아가 나의 존엄이 중요한 만큼, 남의 존엄도 중요한 것을 인지하는 것, 남의 존엄만큼 나의 존엄도 중요하다는 것을 덴마크에서 만난 사람들 은 알고 있었다. 그 속에서 한 사람의 ‘위대한 시민’이 되어가는 것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를 어슴프레하게 나마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 후 나의 학교 생활은 비로소 편안해졌다. 더이상 새우눈으로 비교하고 재고 따지려 하지 않았다. 왜냐면 비밀은 숨겨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흔해서 어디에나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단순히 배움을 소비하려고 했던 내 양심이 따끔거렸다. 

포크하이스쿨의 진가는 개설된 주력 수업만으로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 제 2의 가족과 같은 안전한 공동체 속에서 편안히 먹고, 자고, 일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포도를 따 고, 케이크를 굽고, 맥주를 마시고, 캠프파이어를 하고, 토론하고, 선생님과 농담을 나누고, 숲에서 거닐며,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의 현재’를 누릴 수 있는 시 공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들은 평생을 기쁜일과 어려운 일을 나누는 친구로서 삶 속에 깊이 자리 잡는 경우가 많다. 아, 나도 모르는 사이, 단순히 배움을 소비하려고 했던 내 양심이 따끔거렸다. 

이후 나는 학생조교(‘Student teacher’라고 칭한다)로 가을학기에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되어 한 학기를 더 보낸 뒤 2016년 1월에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 교육은 점점 더 절망적인 상황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 작은 변화의 흐름을 맞이하고 있던 차 였다. 나는 서울시교육청과 한국의 대안교육현장이 협력해 만든 ‘오디세이학교’에서 17세 청소년들을 만나 교사로 일했다. 

 

오디세이학교

오디세이 학교에서는 아침에 모여 함께 노래를 불렀다. 나부터가 IPC에서 매일 아침 모여 노래를 부를 때 마다 머리보다 영혼이, 마음이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이미 가진 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면 했다. 감탄하고, 박수치고, 활짝 웃으며, 햇볕을 즐기는 열일곱살 ‘오늘’을 되돌려 주고 싶었다. 교실 속에서 교과서로 배우 는 과거의 역사 대신, 현재 벌어지는 현장을 찾아 헤매었다. 길거리 시위현장을 찾기도 하 고, 사회적 재난 현장을 찾기도 했다. 산과 들을 찾아 걷는 짧고 긴 여행을 자주 했다. 비록 기숙학교는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서로 기대며 부모님도 알지 못했던 멋진 구석을 서로 발견해 주었다. 이기려고 용쓰는 대신 모두가 지혜로운 사람으로, 우리사회의 일원으로, 현 우리나라에 필요한 새로운 민주시민(Active citizen)으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여러 난관이 있었지만, 시험과 평가가 없는 1년동안 내게 필요한 ‘진짜’ 배움을 경험했다는 학생들의 감상을 졸업 에세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디세이 학교는 구체적인 직업이나 꿈을 알려주기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 이곳에서 배웠던 것 처럼, 오디세이 수료 이후에도 바쁘게 달려서 목표에 도착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삶 보다는, 늦더라도 열심히 달려간 과정, 그 길을 중 요하게 여기는 삶을 살고자 한다.” (2017,김재인, 오디세이학교 졸업 에세이 중)

 

사실, 덴마크의 청소년과는 달리 우리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1년간의 오디세이 학교 생활을 택함에 있어 지나치게 큰 용기를 요구한다. 운이 좋게 부모님들의 지지와 담임 선생님의 추천으로 오디세이 학교에 지원하고 나서도 어떤 친구들은 자신의 생활기록부에 어떤 말이 쓰여질까 염려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이 활동이 제 생활기록부에는 뭐라고 쓰이나요?” 라고 물어보던 한 학생의 경직된 표정을 기억한다. 오디 세이 학교에 온 뒤로 하루 하루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지던 한 친구는 ‘요새 살 맛 난다’는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하루종일 대입을 위한 교과수업을 받는 기존 학교의 친구들에 비해 자신이 도태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며 만성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 당장’ 행복하지 못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아이들은 자꾸 주눅이 들었고 그 주름을 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교사로서 당장 넘어서기 어려운 사회적 한계를 보았다. 오디세이 학교는 교육청이 주관하는 명백한 국가 차원의 사회적 시도인것은 분명하나, 아직은 개인이 감당해야 할 부담이 너무 크다. 

덴마크와 한국간 비행거리만도 14시간이다. 그 물리적 거리만큼 생각의 격차도 매우 크다는 것을 알게 된 일화가 있다. 2017년 4월 서울,인천 교육청 주최로 열린 덴마크 대안 교육을 만나다(We meet the Denmark Alternative Education’)라는 세미나에서 덴마크 선생님들의 열띤 강연이 끝나고 질문이 이어졌다. “시험이 없으면 학생들을 어떻게 평가하 나요?” ,“출석을 부르지 않으면 어떻게 학생들을 관리하죠?”, “수업에 늦거나 빠질때 왜 벌점을 주지 않나요?”, “벌점이나 불이익이 없으면 학생들이 수업에서 이탈하지 않나요?” ... 쏟아지는 질문들 속에서 학생들을 ‘불이익을 주어 제제를 가하지 않으면’ ‘통제’할 수 없는 대상으로 한정짓는 한국 교육계의 현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덴마크 선생님들은 성실하게 학생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대한 대답으로 갈음했다. 이와 같은 현답에도 불구하고 계속 쏟아지던 같은 우문은 세미나가 끝나도록 그 한계를 벗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 대해 우울한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았지만, 변화의 조짐도 많다. 더이상 성장하지 않는 사회에서 경쟁하기보다는 나의 속도를 찾아 잠시 멈추어 서겠다는 흐름이다. 작년 초부터 나는 일터를 옮겨 19세에서 39세 성인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친환경 공법으로 직접 집을 짓고, 토종씨앗을 뿌려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함께 순환하기 위해 닭도 키운다. 같이 요리해 밥을 지어먹고 작은 일거리를 개발하는 1년간의 과정 속에서 각자도생하던 사람들에게 ‘동료’가 생긴다. 자신의 삶을 일구기위한 진짜 ‘기술’과 ‘철학’을 가다듬는다. 대입이나 취업을 목표로 하던 장장 16년간의 학창생활에서는 정작 빼 먹었던 ‘나’로 비로소 돌아온다. 내가 바라는 삶으로의 전환을 꿈꾼다. 한동안 타인의 기대에 부합하는 인생을 쫒아 왔다고 하면 지금부터는 ‘내 맘에 드는’ 삶으로의 이행인 셈이다. 

지금의 한국 교육은 완전히 탈바꿈 되지 않으면 10년이고 20년이고 제자리 걸음을 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학창시절에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교육,
완전히 다른 학교를 상상하고 시도할 수 있는 교사들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지금의 한국 교육은 완전히 탈바꿈 되지 않으면 10년이고 20년이고 제자리 걸음을 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학창시절에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교육, 완전히 다른 학교를 상상하고 시도할 수 있는 교사들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조바심은 갖지 않으련다. 6개월여의 힘들었던 봄학기 생활을 끝으로 한국으로 돌아오려는 마음을 굳히고 있던 나에게 한 학기 더 머무를 것을 권유해 준IPC의 선생님, Claus가 했던 말을 조근조근 되새겨 본다. “우리는 지금 당장 결실을 맺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 당장 내년에 효과가 나타날 수 있고, 10년 후가 될 수 있고, 30년 후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교사로서 내가 만나는 학생들을 믿고 사랑할 뿐이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긴 호흡으로 소중한 것을 시간을 들여 돌보고 지켜나갈 사람들, 특히 좋은 교사와 학부모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라면서 나는 앞으로도 우리의 학교가 덜 경쟁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필자: 이한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하자센터, 오디세이학교 등의 대안교육기관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덴마크 International People's College의 학생이다. 오디세이학교는 한국의 17세를 위한 자유학년제 프로그램으로, 서울시교육청과 대안교육기관들이 협력하여 운영하고 있다. 매해 약 80명의 학생이 프로그램에 등록하고 있으며 2015년 덴마크 에프터스콜레로부터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

 

*이 글은 2019년 덴마크 호이스콜레연합(FFD) 출판부에서 출간한 <10 Lessons from Denmark Folk High School >에 실렸습니다. 첫번째 호이스콜레가 문을 연지 175년이 된 해를 기념해 출간된 이 책 시리즈는 덴마크 문화부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저작권은 이 책의 저자들과 덴마크 호이스콜레연합 출판부(FFD's Forlag)에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책에 실린 저의 글은 호이스콜레연합의 웹사이트에 전문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다만, 책에 실린 글은 영문과 덴마크어이기 때문에 한국어로 쓰여진 저의 글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원 글을 공유합니다. (비영리적 목적으로 전문을 활용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출처를 꼭 밝혀주시고, 필자인 제게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리적 목적의 사용은 금해주시길 바랍니다.)